김혁일 시선 17

트럭

아내 없어 밤일 못하는 트럭은
거리로 나와
공사장으로 나와
밤일을 한다
제법 현대화강국의 금속음을 요란히 내며
짐승 같이 뭐라 울부짖으며
밤거리를 질주한다
이 도시의 알짜 일꾼이지만
이 도시의 하수도 처럼
그늘에 묻혀
어둠에 묻혀
편견과 괄시에 묻혀
수걱 수걱 궂은 일만 도맡아 하는
도시에 아스팔트가 반반히 깔리고
빌딩들이 성형수술한 배우 처럼 미끈해지고 나면
그때 쯤이면
이들이 떠날 때다
밭은 내가 갈고
쌀은 니가 걷고
그저 외양간과 꼴 여물에 만족하며
밤마다
남자들끼리만 하는 거친 밤일을 한다
그러나
옛날 머슴 같은 황소는 아니어서
간혹은 술 먹고 말썽도 부리고
간혹은 어르신네와 시비도 걸고
간혹은 어느 길목에서 귀한 승용차도 한 대 깔아뭉갠다고
손 발이 도둑놈처럼 큰 트럭은
홍등가 그리운 순이 손 한 번 못 쥐어 보면서
그래도 밤에만 나와서 밤일을 하는
밤이 깊었는데
멀리 가까이 미친듯이
트럭이 질주하는 소리가 유리창을 두드린다

 

아침 

날이 밝고
닫힌 창으로
어둠은 어느새 일어나 나가고
빛들이 허옇게 들어와 앉았다
들어온 빛들을 따라
새들의 지저귐이 달려오다
일부는 유리창에 이마를 부딪고
일부는 용케 들어와
내 귀를 깨운다
기지개 켜고
일어나 창을 밀면
밖에서 기다리던 나머지 소리들이
바람과 함께 쓸어들어, 확
커튼에 매달린다

 

허공

내가 여기서 쳐다보는 허공은
당신이 어디서인가 쳐다보는 허공이어서
허공은 비어있지 않아라

내가 지금 쳐다보는 허공은
당신이 언제라도 쳐다볼 허공이어서
허공은 비어 있지 않아라

 

방생하십시오, 마님

방생하십시오, 마님
김혁일선생 가라사대
망아지와 노예와 애인은 풀어주라 하였소
고삐를 풀어주고
소귀에 사랑해 라고 속삭여 보십시오
혹시 얼룩젓소인 당신
그래서 목장의 지존여왕이 될 수 있을지도
자유를 주는 자 자유를 얻을지니
이 세상 흐르는 물 막을 둑은 없소
다독여 흘러보내는 백사장이 있을 뿐이오
이 세상 바람 막을 벽 없소
잠시 바람 재울 숲이 있을 뿐이오
이젠 그만 푸십시오, 마님
김혁일선생 가라사대
허리띠는 조르되 마음은 풀고 가슴은 열라 하였소
커피잔에 설탕 풀리듯
위스키잔에 얼음 살풀이 하듯
이젠 스스로 풀고
그리고 풀어주십시오
설사 개나리꽃이 아니라해도
설사 원같은 적설 한같은 빙천설지일지라도
이제 춘수로 풀려 청산녹수 되시고
추파로 현란하기도 하십시오
틀어쥔 두 손 놓으십시오, 이제
고삐를 놓으십시오
김혁일선생 가라사대
바람을 붙들어 매려는 자 스스로 말뚝이 되리라 하였소
이젠 바람은 바람으로 불라 하십시오
물은 물로 흐르라 하십시오
방생하십시오, 마님
그리고 자유를 얻으십시오

 

 달밤

 풀벌레 자장가에 하나 둘 별들이 졸다 눈 감으면
그리움은 작은 등 밝혀 나를 지켜주고
나보다 심심해 바람이 지나다 풍경 흔들어
창에 비낀 그림자 놀라서 일어서네
님 오나 서둘러 맨발로 문 열면
불빛이 먼저 뛰쳐 나가다 마당에 쓰러지고
돌아와 불 끄고 이제 님 생각 않으려는데
달빛이 창을 넘어 들어와 곁에 눕네

 

나는 행복한 콩나물이지 못할까  

아주 슴슴하다
맹물이다
너무 맹물이어서 좀 비릿하기까지 하다
그래도 콩나물은 우리 겨울 밥상의 왕나물이다
잘 통제된 공간에서
얼기 설기 상수도 먹고 자라며
잎새 하나 바람에 흔들리는 일 없이
꽃잎 하나 울 밖으로 날리는 일 없이
참으로 허옇게 허물 하나 없이
그런데 나는
아주 슴슴하다
맹물이다
너무 맹물이어서 좀 비릿하기까지 하다
그 뿐이 아니다
소독과 표백이 너무 심해 구역질이 난다
왜 나는 행복한 콩나물이지 못할까
왜 나는 자꾸 쓸데 없는 햇살이 그립고 바람이 그립고
창을 지나는 여우비가 그립고
돌돌돌 흐르는 샘물이 그립고
바다의 숨소리가 그립고 그럴까
왜 나는 행복한 콩나물이지 못할까
이 등신은


꽃과 며칠       

꽃은
송이마다
하나 하나 고운 얼굴이어

점도록 마주 보고
마음을 읽고
서로의 체취에 조금씩 조금씩
끌리고 침투되고

그럴려니
그럴려면

아무래도 한 아름 꽃다발보다는
조출한 한 두 송이가 좋겠지

꽃은
송이마다
하나 하나 아름다운 마음이어

꽃을 꽃병에 꽂아두는 것은
꽃과 연애하는 것이어서

이 세상에 와서 살다
어떻게 인연이 되어
고작 사나흘을 같이 하는 시간을

꽃은
한 아름보다는
조촐한 한 두 송이가 좋겠지


  여자하고 애기 하나 낳고 싶은데       

저 여자가 내 몸 속에 심어놓은 씨앗이
내 몸에서 싹이 튼 씨앗이
어떻게 다시 저 여자 몸 속으로 들어가
사랑이 어떻게 잉태하여 애기가 되어 태어나는 것인지

아, 나 저 여자하고 애기 하나 낳고 싶은데

내가 사랑하는 저 여자의 눈매가
어떻게 애기의 눈매가 되어 태어나고
저 여자가 만진 나의 이마가
어떻게 애기의 이마가 되어 태어나는지

아, 나 저 여자하고 애기 하나 낳고 싶은데


 지지배배배배지지  

 오늘은 새들이 먼저 일어나 마당에서 열심히 지저귀네요
-- 일어나지배요, 배배지지 왜 늦잠을 자지배요.

그래, 그래, 애들아
유치원 철이 순이같은 콩알쫑알새들아
내가 간밤 한밤에 깨어 이생각 저생각에 잠 못 이룬 걸 너희 철부지들은 모르겠지

오냐, 오냐, 이제 내가 일어나마
그래, 그래, 내가 못났지배

왜 나는 살면서 이렇게 탈도 많고
왜 너희들처럼 그저 사는 것이 좋아 그저 자고 일어난 아침이 좋아
그저 날씨가 좋고 나무가 좋고 적당히 부는 바람이 좋아 기분이 좋지는 못할까

그래, 그래, 너희들 말이 맞다
다 욕심 때문이지배
다 욕심에 가슴이 눌려서 숨이 막혀서지배

누가 너희를 철부지라고 하랴
철부지는 나인 걸
이것 저것 투정이 많아
이래 저래 맺힌 것이 많아
허구한날 못나게 쩍하면 밥맛 잃고 잠맛 잃고 입술 부르트고

그래, 그래, 알았다지배배배지지
너만큼만 적게 가지믄 너만큼만 가벼워지믄
나도 매일 아침 지지배배 노래 부르며 밝은 하늘을 비상하리


꽃처럼

가장 이쁜 꽃시절 한 때를 내게 주고 간
꽃처럼

너에게 나도
더도 말고
한 사나흘의 花期였으면

가장 이쁜 한 때를
가장 이쁘게 한 때를
가장 이쁜이와 한 때를
같이 하는 거

꽃처럼
더도 말고 나는
너에게 한 사나흘의 사랑이었으면

님이 아니었던들
나는 피지도 않았을 것을
님이 아니었던들
이 한 때를 속절없이 보냈을 것을

님을 위해 피고
님을 위해 피었다 지는

그래서

져도
잊혀도
버려져도

나는 원하지 않으리
탓하지 않으리
울지 않으리

꽃처럼
봄처럼
소리 없이 왔다가
소리 없이 가리

그대의 옷깃에 향기 한 점 남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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