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혁일 시선 24

겨울 보며

가을이 되면
나무는 옷을 벗는다

겨울하늘이
하얀 옷 한 벌 벗어 땅에 내려놓기 전에
나무는
먼저 옷을 벗는다

裸木은
가장 추운 겨울을
가장 얇은 옷으로 난다

벗는 자는 강하다
벗는 자는 아름답다

벗는 나무가 더 아름다운 봄을 맞을 수 있다

가을이 되면
나무는 스스로 머리 깎고 출가한다

깨친자는 떠난다
깨친자는 부린다

가을이 되면
우리도 욕심 하나 쯤은 털고 가자


양식()

하루 하루를
해바라기처럼 까선
열심히
먹는 시늉을 해본다

턱밑으로
세월의 껍질들이 흩날린다
낙엽처럼 흩날린다

그러나 씹히는 건
허공과 바람 뿐

그래도 나의 키는
자꾸 커가고 있다

허기증은 무엇보다도 맛이 좋다

참으로 배가 부르다
풍선만큼이나 배가 부르다


( 臥 禪)

나는가지 않으면 쓰러질 바람
고이 틀고 앉아 눈 감고 좌선 못하는 바람

쫓기듯 쫓기듯 가다 잠풍하는 날은
내가 와선(臥禪)하는 날

멀리 하늘과 땅 사이를 지평선 처럼 드러누울 때는
원같은 땅 한같은 하늘이 한 번 쯤은 합일(合一)이 되는 때


홀로의

한 송이 꽃은 해석하지 못한다
모대김의 못짓이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
바람을 껴안아 다독여 잠 재울 수림은 이 도시에 없다
하늘 끝까지 먼지를 펄펄 날리며
바람은 가끔 실성한다
한 그루 나무는 결코 하나의 꿈일 수가 없다
홀로의 몸짓이 모대김의 몸짓이
그저 초연할 뿐이다
그저 초연하게 보일 뿐이다


봄맞이

오늘 교외로 나가는 길에 시내로 쳐들어오는 아군부대를 보았다. 줄지어 들어오는 트럭들 위에는 훤칠하고 끌끌한 소나무들이 국방색 정장을 하고 앉아있었다. (잘코사니. 봄의 반공은 이제 시작됐구나!)

교외로 나와 보니 거긴 벌써 초록색 아군의 천지였다. 나는 광복 맞는 망국노처럼 들과 숲을 날뛰었다. 그리고 초록색 폭탄이 시내 구석구석에 무수히 폭발되기를 이 갈며 기도했다.


새벽

새벽 두 시
나의 아침이 시작됩니다
잠자리에 듭니다
발가벗은 알몸으로
꿈을 찾아갑니다


감자의 마음

봄이 오면
성급한 진달래보다
아가씨들의 치마가 먼저 핀다

그러나
진달래보다 아가씨들보다 더 성급한 것은
감자의 마음이다

감자는
오로지 봄에 대한 섣부른 예감 하나로도 싹이 트는
우직한 족속이다

돌석이의 둥글둥글한 얼굴 같은
감자의 마음은
겨울에도 피는 꽃이다


아침 기차

오늘 아침도
기차가 땅을 구르는 소리가
지심을 흔든다

오늘 아침도
떠나고 싶은 사람은 떠나지 못하고
떠나는 기차의 고동을 듣는다

오늘 아침도
떠나지 못한 철새 한 마리는
떠나는 기차의 고동에 소스라친다


바람은 치마를 입지않는다

자전거를 타면 좀 더 멀리 교외로 나갈 수 있다
그러나 바다까지 가면 자전거는 짐이 되기도 한다
길을 버리고 백사장 따라 무작정 걷고 싶을 때 자전거는 애물이 된다
버릴 수 있는 모든 것은 짐이다
버릴 수 없는 모든 것은 짐이다
하늘을 나는 새에게는 반지 하나도 짐일 수 있다
바람은 치마를 입지 않는다 


시골학교

애들이 없는 시골 학교는
바람 소리만 유독 크다

지금은 홀로 남은 홀아비
덩치 큰 學舍는 옆드려 조을고

텅 빈 오후의 운동장엔
구름만 무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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