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혁일 시선 14

가을에는 마른 벌로 떠나자 

 

 

가을나그네는 젖지 말라

가을에 젖으면 마르지 않는다

젖으면 긴긴 겨울

마음이 춥단다

비가 와도

우산 없이 걸어도

가슴 한 구석은 팔굽으로 막아서

기어이 안 젖을 일이다

서리 내리는 늦가을 밤에는

마른 가지 꺾어

낙엽 쓸어모아

모닥불을 피울 일이다

젖을 일이 아니다

그것이 땀이든 눈물이든 우울한 안개든 뼛속의 습기든

젖은 것은 다 꺼내

다 뒤집어서

골고루 말릴 일이다

잘 마른 장작개비보다 더 잘 말릴 일이다

더 기다릴 것도 없고

더 뒤돌아 볼 것도 없고

담배 한 개비 태우고

소주 한 잔 기울이고

이젠 일어설 때다

일어나자 나그네야

더 젖지 말자

더 젖을 일이 아니다

겨울이 저쯤에서 서성이는 것이 안 보이는가

겨울보다 더 먼 곳에서 봄이 힐끗 힐끗 훔쳐보는 것이 안 보이는가

가을에는 떠나자

모든 여리고 함초롬하고 나그나긋했던

눈빛과 손짓과 몸짓과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흩어지는 머리카락들을 정리하고

가을나그네는

쓸쓸한 나그네는

그러나 마른 잔등으로 떠날 일이다

잘 말린 겨울옷 한 벌로 떠날 일이다

아리랑 부르며

이 골짝의 단풍이 다 지기 전에

저 아리랑고개를 넘어갈 일이다





가을 하늘


1


노안의 하늘은

문득 저만큼 고개를 젖히고


마음의 커튼은

주룩 사면으로 걷히고


하나는 돋보기 걸고

하나는 창문 열고


초면인 듯 새삼스레

서로를 쳐다보는


하늘과


서로가 요만큼 먼 것이, 가을엔

서로의 가슴이 요렇게 푸른 것이



2


하늘은 무슨 翼을 움직여, 저렇게

건듯 높아졌는가


저 거대한 낙하산은

활짝 마음을 펼친 낙하산은


서서히 위로

위로 날고 있는 낙하산은


무거운 지구를 달고

머언 어디를 가려고


하늘은

마음은


푸르기만 한데

높아만 가는데



가을 山舍에서


1


언제 봐도 점잔은 선비

山舍에 서걱이는 대숲


오늘따라 모름지기

말씀들이 어른스러운데


공자 가라사대

맹자 가라사대


2


그러나 천년 고목은 사뭇 말씀이 없으신데

귀 기울여 들으면 툭 툭 낙엽 던지는 소리

그 것도 구구절절 다 노자의 가르치심이구나


하늘이 뭐라고 하던가

땅이 뭐라고 하던가


3


나도 이젠 산사람

밋밋한 대나무로 숲에서 산 지 8년

서당개 3년에 풍월을 알아라




꽃에게 


아침이슬로 세수하고

여우비에 샤워하고


쌩얼이 고우니

화장은 안 해도 좋고


향기는 니 향이 최고니

향수는 뿌리지 말고


꼭꼭 여며라

옷깃 날려 향기 샐라


꽁꽁 숨어라

영남이한테 들킬라




해맞이


오늘은 좀 일찍 일어나야지

오늘은 새보다 일찍 일어나 아침 해 마중 나가야지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살며 지금까지

해는 날마다 첫사랑 첫 데이트 하는 처자처럼 나를 찾은 걸 나를 사랑했던 걸

나는 여태 몰랐구나

꼬박꼬박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에게 와 주는 해를

나는 여태껏 마중 한번 나가지 않았다니

참으로 무심했구나

버릇이 없었구나

실례가 많았구나

해는 그렇게 멀리서 오면서도

일억 오천만 킬로를 오면서도

불만 불평 한 마디 없었는데

나는 좀 일찍 일어나 다문 십 리라도 마중 한 번 나가지 못하겠는가

그래, 오늘은 좀 일찍 일어나야지

오늘은 새보다 일찍 일어나 아침 해 마중 나가야지

그러나 노을이 먼저 나가 벌써 동녘에 붉은 카펫을 깔았구나

달팽이도 목을 빼들고 동녘을 향해 다급한 걸음이구나

모든 풀들 나무들 꽃들 가슴에 손을 얹고 아침 해 맞누나

그러나 살면서 나는 한 번도 이들의 아침 예식을 몰랐구나

내가 미욱했구나

몰지각했구나

아직도 철이 덜 들었구나

그러나 오늘부터는 나도 숲으로 들어가 나무가 되리

내가 먼저 팔을 벌려 천수관음이 되어 아침 해 얼싸안으리

내일은 좀 더 일찍 일어나야지

가장 이른 새보다도 더 먼저 일어나야지

아니, 새벽 수탉보다도 먼저 일어나야지

눈을 뜨는 순간 맨발로 뛰쳐나가 십리를 마중 나가 언덕에 올라

새벽 길 오는 해 먼 길 오는 해 바라고 길게 목 빼들고 홰를 쳐야지

꼬- 끼- 요-

숨이 넘어갈 때까지

숨이 넘어가게

사랑하겠노라고

꼭- 이- 요-

꼭- 이- 요-




어둠은 산을 지우고

 


어둠은 먼 산을 지우고

가까운 언덕을 지우고

급기야 동구밖 백양나무 두 세 그루마저 지우고…


그러나 하늘은 지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어둠보다 더 깊은 청색으로

깊어진다

짙어진다


너의 두 눈과

내 마음 속의 등불 하나와

더불어

밤하늘엔, 별들이

하나 둘 셋 넷… 돋아난다


밤이 깊어도

세상이 막장이어도

지워지지 않는

우리의 하늘

너의 눈



너와    



입술이 닿지 않아도

손끝이 닿지 않아도


스치는 바람만으로도

서로를 잉태하는


풀처럼


옷깃 한 번 스칠 일 없어도

아주 멀리 있어도


바람 부는 들녁에 서서

우리는


서로를 모르고 살아도

그래도 우리는


끝까지

너와 나



기타는 다시 울립니다 

 

당신이 가던 날

弔鐘은 울리지 않았습니다

동아줄 같은 현이 울렸습니다

툭 끊어지며 울렸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대가 온 몸으로 부른 노래를 나는 들을 수 없었습니다

大音希聲이어서만도 아니고

너무 큰 슬픔이어서만도 아니고

그저 그때는 마음이 텅 비어 세상이 텅 비어

잉잉 바람 소리만 고막을 채우고

아무 소리도 울리지도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이제 일 년 석 달을 삭여

이제야 나는 당신에 대해 뭘 좀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이여

동아줄 같은 현이여

밭고랑같은 현이여

논두렁같은 현이여

강줄기 같은 현이여

가는 산의 능선 같은 현이여

끊어지면서도 당신은 이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멜로디였습니다

슬픔만은 아니었습니다

노래였습니다

합창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풀과 나무와 물과 흙과 바위들이 합창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멀리 하늘가에서 땅끝에서 들립니다

점점 또렷이 점점 크게 들립니다

그대가 떠나고 일 년 석 달이 지나고

누리를 흔드는 큰 울림으로

우리는 이제 합창하고 있습니다

이루리라

이루리라

우리들의 푸른 꿈

꼭 이루리라

당신의 육성이 다시 들립니다

우리의 심장 가까이에서 들립니다

끊어진 현은 다시 이어지고

통기타 치는 우리의 친구로

우리 곁으로 당신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베토벤을 듣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집

오랫동안 사람이 살았으나 창을 열지 않은 집


오늘은 앞창 뒤창 북향 창 남향 창 다 열려

동서남북으로 바람과 볕이 좌충우돌하고

창밖 먼지 쓴 나무들도 오랜만에 시원히 여우비로 샤워하고


오늘은 내 머리칼에 바람이 부는 날

오늘은 내 오지랖에 볕 냄새 싱그런 날


아픈 갈비뼈 열락의 건반이 되고

누구의 열 손가락 마구 마구 내 가슴을 연주하고


오늘은 오랜만에 베토벤을 듣는 날




저물녘 시골 학교의 풍금 소리



저물녘 누구의 풍금 소리

붕붕 풍금 소리


나는 갑자기 울고픈데

엄마 본 미아처럼 와-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데


누구의 여린 손

누구의 매운 손


이렇게 죽도록

내 등을 패 대나


저물녘 시골 학교의 풍금 소리

서툰 풍금 소리


서툴러 내 지나간 첫사랑 같은

서툴러 내 살아온 인생 같은


얼마는 바람에 날리고

얼마는 세월에 바래고


그래도 붕붕 잘도 울리네

나그네 가슴이 펑펑 뚫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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