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는 마른 옷 한 벌로 떠나자
가을나그네는 젖지 말라
가을에 젖으면 마르지 않는다
젖으면 긴긴 겨울
마음이 춥단다
비가 와도
우산 없이 걸어도
가슴 한 구석은 팔굽으로 막아서
기어이 안 젖을 일이다
서리 내리는 늦가을 밤에는
마른 가지 꺾어
낙엽 쓸어모아
모닥불을 피울 일이다
젖을 일이 아니다
그것이 땀이든 눈물이든 우울한 안개든 뼛속의 습기든
젖은 것은 다 꺼내
다 뒤집어서
골고루 말릴 일이다
잘 마른 장작개비보다 더 잘 말릴 일이다
더 기다릴 것도 없고
더 뒤돌아 볼 것도 없고
담배 한 개비 태우고
소주 한 잔 기울이고
이젠 일어설 때다
일어나자 나그네야
더 젖지 말자
더 젖을 일이 아니다
겨울이 저쯤에서 서성이는 것이 안 보이는가
겨울보다 더 먼 곳에서 봄이 힐끗 힐끗 훔쳐보는 것이 안 보이는가
가을에는 떠나자
모든 여리고 함초롬하고 나그나긋했던
눈빛과 손짓과 몸짓과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흩어지는 머리카락들을 정리하고
가을나그네는
쓸쓸한 나그네는
그러나 마른 잔등으로 떠날 일이다
잘 말린 겨울옷 한 벌로 떠날 일이다
아리랑 부르며
이 골짝의 단풍이 다 지기 전에
저 아리랑고개를 넘어갈 일이다
가을 하늘
1
노안의 하늘은
문득 저만큼 고개를 젖히고
마음의 커튼은
주룩 사면으로 걷히고
하나는 돋보기 걸고
하나는 창문 열고
초면인 듯 새삼스레
서로를 쳐다보는
하늘과
나
서로가 요만큼 먼 것이, 가을엔
서로의 가슴이 요렇게 푸른 것이
2
하늘은 무슨 翼을 움직여, 저렇게
건듯 높아졌는가
저 거대한 낙하산은
활짝 마음을 펼친 낙하산은
서서히 위로
위로 날고 있는 낙하산은
무거운 지구를 달고
머언 어디를 가려고
하늘은
마음은
푸르기만 한데
높아만 가는데
가을 山舍에서
1
언제 봐도 점잔은 선비
山舍에 서걱이는 대숲
오늘따라 모름지기
말씀들이 어른스러운데
공자 가라사대
맹자 가라사대
2
그러나 천년 고목은 사뭇 말씀이 없으신데
귀 기울여 들으면 툭 툭 낙엽 던지는 소리
그 것도 구구절절 다 노자의 가르치심이구나
하늘이 뭐라고 하던가
땅이 뭐라고 하던가
3
나도 이젠 산사람
밋밋한 대나무로 숲에서 산 지 8년
서당개 3년에 풍월을 알아라
꽃에게
아침이슬로 세수하고
여우비에 샤워하고
쌩얼이 고우니
화장은 안 해도 좋고
향기는 니 향이 최고니
향수는 뿌리지 말고
꼭꼭 여며라
옷깃 날려 향기 샐라
꽁꽁 숨어라
영남이한테 들킬라
해맞이
오늘은 좀 일찍 일어나야지
오늘은 새보다 일찍 일어나 아침 해 마중 나가야지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살며 지금까지
해는 날마다 첫사랑 첫 데이트 하는 처자처럼 나를 찾은 걸 나를 사랑했던 걸
나는 여태 몰랐구나
꼬박꼬박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에게 와 주는 해를
나는 여태껏 마중 한번 나가지 않았다니
참으로 무심했구나
버릇이 없었구나
실례가 많았구나
해는 그렇게 멀리서 오면서도
일억 오천만 킬로를 오면서도
불만 불평 한 마디 없었는데
나는 좀 일찍 일어나 다문 십 리라도 마중 한 번 나가지 못하겠는가
그래, 오늘은 좀 일찍 일어나야지
오늘은 새보다 일찍 일어나 아침 해 마중 나가야지
그러나 노을이 먼저 나가 벌써 동녘에 붉은 카펫을 깔았구나
달팽이도 목을 빼들고 동녘을 향해 다급한 걸음이구나
모든 풀들 나무들 꽃들 가슴에 손을 얹고 아침 해 맞누나
그러나 살면서 나는 한 번도 이들의 아침 예식을 몰랐구나
내가 미욱했구나
몰지각했구나
아직도 철이 덜 들었구나
그러나 오늘부터는 나도 숲으로 들어가 나무가 되리
내가 먼저 팔을 벌려 천수관음이 되어 아침 해 얼싸안으리
내일은 좀 더 일찍 일어나야지
가장 이른 새보다도 더 먼저 일어나야지
아니, 새벽 수탉보다도 먼저 일어나야지
눈을 뜨는 순간 맨발로 뛰쳐나가 십리를 마중 나가 언덕에 올라
새벽 길 오는 해 먼 길 오는 해 바라고 길게 목 빼들고 홰를 쳐야지
꼬- 끼- 요-
숨이 넘어갈 때까지
숨이 넘어가게
사랑하겠노라고
꼭- 이- 요-
꼭- 이- 요-
어둠은 먼 산을 지우고
어둠은 먼 산을 지우고
가까운 언덕을 지우고
급기야 동구밖 백양나무 두 세 그루마저 지우고…
그러나 하늘은 지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어둠보다 더 깊은 청색으로
깊어진다
짙어진다
너의 두 눈과
내 마음 속의 등불 하나와
더불어
밤하늘엔, 별들이
하나 둘 셋 넷… 돋아난다
밤이 깊어도
세상이 막장이어도
지워지지 않는
우리의 하늘
너의 눈
너와 나
입술이 닿지 않아도
손끝이 닿지 않아도
스치는 바람만으로도
서로를 잉태하는
풀처럼
옷깃 한 번 스칠 일 없어도
아주 멀리 있어도
바람 부는 들녁에 서서
우리는
서로를 모르고 살아도
그래도 우리는
끝까지
너와 나
기타는 다시 울립니다
당신이 가던 날
弔鐘은 울리지 않았습니다
동아줄 같은 현이 울렸습니다
툭 끊어지며 울렸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대가 온 몸으로 부른 노래를 나는 들을 수 없었습니다
大音希聲이어서만도 아니고
너무 큰 슬픔이어서만도 아니고
그저 그때는 마음이 텅 비어 세상이 텅 비어
잉잉 바람 소리만 고막을 채우고
아무 소리도 울리지도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이제 일 년 석 달을 삭여
이제야 나는 당신에 대해 뭘 좀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이여
동아줄 같은 현이여
밭고랑같은 현이여
논두렁같은 현이여
강줄기 같은 현이여
가는 산의 능선 같은 현이여
끊어지면서도 당신은 이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멜로디였습니다
슬픔만은 아니었습니다
노래였습니다
합창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풀과 나무와 물과 흙과 바위들이 합창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멀리 하늘가에서 땅끝에서 들립니다
점점 또렷이 점점 크게 들립니다
그대가 떠나고 일 년 석 달이 지나고
누리를 흔드는 큰 울림으로
우리는 이제 합창하고 있습니다
이루리라
이루리라
우리들의 푸른 꿈
꼭 이루리라
당신의 육성이 다시 들립니다
우리의 심장 가까이에서 들립니다
끊어진 현은 다시 이어지고
통기타 치는 우리의 친구로
우리 곁으로 당신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베토벤을 듣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집
오랫동안 사람이 살았으나 창을 열지 않은 집
오늘은 앞창 뒤창 북향 창 남향 창 다 열려
동서남북으로 바람과 볕이 좌충우돌하고
창밖 먼지 쓴 나무들도 오랜만에 시원히 여우비로 샤워하고
오늘은 내 머리칼에 바람이 부는 날
오늘은 내 오지랖에 볕 냄새 싱그런 날
아픈 갈비뼈 열락의 건반이 되고
누구의 열 손가락 마구 마구 내 가슴을 연주하고
오늘은 오랜만에 베토벤을 듣는 날
저물녘 시골 학교의 풍금 소리
저물녘 누구의 풍금 소리
붕붕 풍금 소리
나는 갑자기 울고픈데
엄마 본 미아처럼 와-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데
누구의 여린 손
누구의 매운 손
이렇게 죽도록
내 등을 패 대나
저물녘 시골 학교의 풍금 소리
서툰 풍금 소리
서툴러 내 지나간 첫사랑 같은
서툴러 내 살아온 인생 같은
얼마는 바람에 날리고
얼마는 세월에 바래고
그래도 붕붕 잘도 울리네
나그네 가슴이 펑펑 뚫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