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혁일 시선 19

아침 반나절

내 영혼은 아직도 배고픈 홀아비
오늘도 아침 반나절
좋은 시집 한 권이 식모가 되어 주고
오늘따라 반듯한 마당엔
새들이 유난히 부산을 떤다
새동네 아낙네들 다 모였는지
왁자지껄 참으로 요란스운데
창밖에 햇빛이 저렇게 좋은 걸 보면
괜히 내 가슴이 떨리는 걸 보면
오늘은 작은아씨가 급기야
나에게 시집이라도 오려나 보다

 

이슬연가

나 당신 꿀 먹으러 온 벌 아니오
나 이슬이오
당신은 이슬이 목마른 꽃인 줄
내가 아오

당신 눈빛이 밤하늘 같으오
별들이 총총하오
이런 밤 하늘 아래
마주 보는 젖은 눈길
이슬이 아니고 더 무엇이겠소

이꽃 저꽃 찾아 당신에게까지 왔지만
나 이제 쉽게 날아가지 못하는 이슬이 되었소
바람같이 왔지만
나 이제 바람같이 떠나지 못하오

나 당신 놀러 온 나비 아니오
꽃이 목마른 이슬이오
당신을 사랑해 나 백 번 죄가 있어도
無期囚가 되어도
나는 끝까지 감로 같은 이슬이오
초로인생 덧없고 무상해도
나 당신을 숨쉬며 이제 더 여한이 없소

바람이 부오
이슬이 땅에 떨어져 부서지기 전에
임이여 날 품어주오
아침이 너무 찬란하오
한낮의 뙤약볕 나 피말리기 전에
임이여 날 먹어주오

 

배꽃

선글라스 벗고
긴 속눈썹을 슴벅인다,꽃이
-- 아, 당신이었군요

마스크 내리고
고운 쌩얼을 드러낸다, 꽃이
-- 저예요, 모르시겠어요?

날리지도 않는 옷깃 애 써 여미며
희끗 희끗 흰 속살 드러내며
-- 아, 봄이네요

포르릉 노랑새 한 마리 꽃 가지 날고
아가씨 화들짝 놀라
-- 어머머

치마 저고리 땅에 떨어뜨리고
이브가 된다 아가씨
아담의 여자가 된다

 

석탄

나의 사랑은
시커먼 화석이 되어서도
불씨로 살아 있다고 하더이다
너무 깊이
너무 오래
다지고 만져
이젠 손때마저 반질반질 도는
구태여 그게 뭐냐고
왜 그래야만 하느냐고
그건 그렇고 어디매 쯤 어떻게 얼마나 매장되어 있느냐고
시세는 어떻고 채굴하면 값어치는 얼마나 되고
귀한 부인 하나 젊은 애인 두 셋 보동보동 먹여 살릴 수는 있느냐고
그렇게는 묻지 말아다오
세상이 모르는
나도 잘 모르는
나만의 사랑은 따로 있다오
그 사랑을 찾아
이 늑대 같은 도시 이 여우 같은 세상을 떠나
나 이제 화전민이 될까 하오
애인은 풀무질하고
나는 대장장이가 되어
녹 쓴 쇠붙이 시뻘겋게 달궈 탕탕 두드려
쟁기며 호미며 연장 도구 단조하여
이제 내님하고 철기시대 하나 이룩할까 하오
그리고 나 지금 증기기관차도 한 대 찾고 있소
석탄 때 불 지피면 칙칙푹푹 소리치며 달리는
그런 황소 같은 증기기관차 말이오
어디 쑥밭에라도 버려져 있다면
어느 박물관에라도 전시돼 있다면
반드시
화급히 나에게 전보 한 통 쳐 주셔야 합니다
봄이 바야흐로 무르익는 요즘
나도 이제 내님과 함께 서서히 칙- 칙- 푹- 푹- 시동을 걸어
눈 녹는 3월을 출발해
유채꽃 피는 사월을 가로질러
간간이 길게 기적도 뽑으며
멀리 멀리 사랑 여행 한 번 떠날까 하오

 

아침 산책

아침은 황새걸음으로 성큼성큼 걷기
노총각 장가가는 아침 아니어도
과장님 부장님 되는 날 아니어도
딱히 어디 갈 곳 없어도
그래도 바람 일구며 걷기
순간 순간 스치는 재밌는 생각 쫑알새 빨간 발에 매달아 나뭇가지에 걸어보기
이 가지서 저 가지로 저 나무서 이 나무로 뜀질도 시켜보기
천년은 살았을 거목 벵골보리수는 그냥 지나치지 않기
감개무량하며 서성이며 한 오백 년 전쯤 아침을 한 5분쯤 걸어보기
낯이 익은 언덕 위 키 큰 선비나무 두 세 그루에게는 멀리서부터 손 저어 인사하기
언덕에 올라 그들과 나란히 먼 산 보기
야—호—
수놈이니까 봄이니까 아침이니까 장닭처럼 목 빼들고 홰치기
천년을 기다린 임 아직 이름 석자 몰라도 그래도 목놓아 불러보기 뭐라 뭐라 불러보기
멀리 어딘가에 있기나 있을 있으면 깨기나 했을 내 님 이마에 가벼운 키스 하나내려놓기
흘러간 세월엔 청춘엔 비석 안 세우기
청명절이 돼도 화환 같은 거 안 갔다놓기
흘러가는 것은 아름답게 흘러가라는 김혁일선생의 그 말씀 다시 한 번 되뇌기
땀 흘린 몸으로 점도록 바람 부는 언덕에 앉아 시 쓰다 감기 걸리지 않기
잊지 말고 외투 하나 잘 챙겨 땀나면 벗고 땀 식으면 걸치기
혼자 알아서 임 오는 날까지 몸 건사 잘하기 건강관리 잘하기
좋아도 울지 않기
슬퍼도 웃지 않기
할 말이 많아도 별로 할 말이 없기
그저 혼자 흥얼거리기 노래 부르기 휘파람 불기
공짜로 먹는 아침 공기는 많이 먹기
욕심부리기
깊이 깊이 들이마시기
취하기
그냥 주는 아침 햇살은 한 오지랖 듬뿍 담기
허리춤에도 쓱 찌르기
이마에 발라 가기
코끝에 묻혀 가기
돌아와 마당은 매일 쓸기
새똥과 꽁알이쫑알이들이 흘린 지저귐은 그대로 남겨두기
……
……

 

화려한 꽃병보다
그저 맑은 유리컵 하나가
한 아름 꽃다발보다
그저 아련한 싱글꽃 한 두 송이가
나는 좋다
그저 점심 한때
아니면 오전 혹은 오후
잠깐 볕이 드는
창이면
꽃은 시집을 올 수 있으리
시인은 마음을 기댈 수 있으리
치렁치렁 처녀애 머리칼 자르듯
썩둑 잘라 뿌리도 없이 찬 물에
그렇게 며칠 피다 시드는
그게 안쓰럽기도 하지만
꽃도 계절도
사람이 사는 것도
다 한때
꽃생 인생
떠날 때는 떠나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고운 님과 같이하는
짧은 며칠 더없이 소중하여
낮은 기침 소리 한 조각조차
이쁘게 내 이마를 만지고
이 세상 이 인생
이 겨울 나의 창턱엔
오늘도
유리컵 하나
물 반 잔
왔다 가는 꽃 한두 송이


어떤 친구가 들려준 슬픈 이야기

-- 어젯밤 자넬 배웅하고 나서 육교를 건너는데
어떤 젊은 여자가 슬프게
아주 슬프게 엉엉 울고 있더라구

나는 그 불쌍한 여자의 모습이 눈 앞에 선해
처연해서 친구를 쳐다보았다

-- 무슨 사연이기에
대체 무슨 슬픈 사연이기에

친구의 얼굴엔 착잡한 표정이 역력했다
잠간 머뭇거리다가

-- 근대 그거 거짓 아닐까? 짜고 치는 고스톱 아닐까?
-- 짜고 치다니?
-- 다가가 위안이라도 하면….그 때 돌연 패거리들이 뛰쳐나와… 당신 이거 뭐야. 이 아가씨를 어찌한 거야?
-- 덫? 협박?
-- 혹시, 그런 거 아닐까? .

아, 어쩌다 세상은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

참으로 슬프다
우는 여자가 슬프고
우는 여자를 스치는 행인들의 그림자가 슬프고
우는 여자가 불쌍해 위로해 주고 싶어도 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그 친구가 슬프고
아니야, 그런 거 절대 아니야 라고 자신있게 친구에게 말해주지 못하는 나 또한
참으로 슬프다


겨울향기(3) 

피나무를 찾아 꽃들이 오고
꽃들을 찾아 벌들이 오고
그러다
꽃들이 비 오듯 지고
꽃들이 눈처럼 흩날리고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양봉꾼도 꿀 지게 지고 산을 내린 뒤
산에는 곰 한 마리가
늦가을까지 봄 앓이를 하고
그러다
그 지독하게 미련한 곰도 포기하고 떠난 뒤
산에는
잘 마른 웅담과 잘 마른 꽃의 씨앗들이
하얀 눈을 혼수이불처럼 덮고
겨울을 난다
너 때문에
겨울이 길어도
너 때문에
겨울이 외로워도
너 때문에
간혹은 눈부신 눈 위에 눈부신 햇살이 쌓이고
웅담은 쓰다
쓰다못해 조금은 향긋하다
꽃의 씨앗만큼

 

겨울향기(2)

꽃이 피는 계절이 왔다
꽃이 지는 계절이 왔다
또 꽃을 외면할 수 없는 계절이 왔다
저 처절한 것들
저 요염한 것들
저 물같은 것들
저 바람같은 것들
타는 노을처럼
사랑은 이토록 슬프고 진하고
설레는 숲처럼
사는 것은 이처럼 벅차고 행복하고
아 아
또 즈징화꽃이 피는 계절이 왔다
또 즈징화꽃이 지는 계절이 왔다
또 아침마다 피는 꽃을 안 보고는
지는 꽃을 안 밟고는
아무 데도 갈 수 없는
겨울이 왔다

 

겨울향기(1) 

눈이 오네
그대가 그리워 밤은 깊고 별은 크고
그대가 미워 겨울은 춥고
그러다
그러다
눈이 오네
눈이 오네
그대를 향한
나의 그리움과 같은
눈이 오네
눈은
피면서 지는 꽃
피지도 못하고 지는 꽃
아니 아니
눈은
지면서 피는 꽃
얼어도 피는 꽃
죽어서도 피는 꽃
눈이 오네
봄부터 기다려
겨울까지 기다려
그대를 향한 그리움은
끝내 눈이 되어 오네
하얗게 오네
눈이 오네
당신을 대신해
당신의 입술
당신의 귀밑머리
당신의 손끝
당신의 향기 만큼 부드러운
눈이 오네
하염없이 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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