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혁일 시선 7

너에게로 가는 길

다 주고 나니 이렇게 가벼운 것을
다 주고 나니 이렇게 풀리는 것을
동토여 겨울강이여
이제 풀리고 녹고 흘러서
수천리 구릉과 평원을 달려서
드디어 바다에 이르러 소멸되는 환희여


오대산 가다 만난 돌

계곡 하나 끼고
청산 하나 업고

어느 계집이 시집올라꼬
푸르게 면도 하고

햇살에 문신한 잔등을 하고
바람에 문신한 허리를 하고

그러고도 모자라 지고 간 꽃의 향기까지
죄다 가슴 언저리에 새기고

천년이 지나고 만년이 흘러도
주름살은 한 오리도 안 흘리고

돌이여, 남자여
미련하게 아름다운 兄이여



메아리 타령

고요한 아침의 나라여

떠나고 백 년

아직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여

적막 협곡 가로질러 수천 리

지금 넌 어디 쯤을 걷고 있느냐

돌아오는 날은 성당의 종소리가 되어 울려퍼질

그러나 지금은 풍경소리 하나 안 흩어지는…

멀리 하늘 끝까지 가서도

끝끝내 어느 작은 가슴 하나 다치지 못하고

그래서 넌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겠지

그럼 이젠 내가 나설 때인가

널 찾아, 5천 리 적막 협곡 가로질러

하얀 민들래꽃으로 날려야 할 때인가

아니, 나는 바람이어야 하리

봄날의 솔숲을 뚫는 바람이어야 하리

그러나 너무 멀리 가지 않아도 되리

어느 샛길이라고 얌전한 꽃 한 송이 없으랴

그 꽃이 지기 전에

그 꽃에 이슬 한 방울로 맺히면

이슬은 스스로 충만하리

메아리로 충만하리

그리고, 그러다 깨지면

깨진 대로 좋으리

터지는 꽃봉우리만큼 좋으리

또한, 야속하면 야속한 대로 이쁘리

휘휘 지는

벚꽃만큼 이쁘리



여우비 지나는 광야에서

하늘은 요즘도 사춘기

오늘은 또 누구와의 눈먼 사랑인가

여우비 빛발치네

사랑은 피할 수 없는 것, 여우비처럼

그렇게 조우하는 것

그렇게 지나가는 것, 그렇게

가끔은 갔다가 다시 오기도 하는 것

네 변덕을 나라고 알랴만

모르니 고스란히 맞을 일

모르니 노래 부르며 걸을 일

비는 맞으면 될 것이고

맞으면 어깨 머리카락 젖으면 될 것이고

젖으면 벗고, 앞가슴 생살 오랜만에 눈부시리

사랑하여, 나는 죄수, 장기수

평생 유배 가는

아, 멀고 외로운 유배길이여

그러나 오늘도 광야에서 조우하는 여우비여

무슨 화풀이를, 넌 그렇게 예쁘게 하느냐

울고 웃고, 하늘은 저렇게 해맑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

내 가슴 깊은 수림이여, 어두운 수림이여

오늘은 너의 웃음 햇살인양 가득 꽂고

오늘은 오랜만에 언덕 위에 쓰러지리

엎디어 반나절만 행복하리



대답

왜 저기 서 있을까?
심심하지는 않을까?

십 년을 보아왔던 저 길목 나무 한 그루
왠지 오늘 문득 궁금해진다

나 또한 그러하리라
세상 사람들의 눈에

꽃은 왜 피고 또 왜 지는가?
나는 나에게 묻는다

그리고 나무처럼
아무런 대답도 못한다

안 한다



오랜 가뭄 끝에는
반드시 비가 온다

비가 오면
나는 창을 연다

너무 오래 기다린 날에는
멀리서 비가 와 당신의 안부를 전한다

당신의 편지
바람에 부친 편지

지금
빗소리가 읽고 있다



펭귄도 새인가?

이젠 너무 왜소해진 나래

휘저어도 퍼드덕, 소리 한번 시원히 못 내는

아, 그래도 당신은 새인가

날지도 못할 거

차라리 원숭이같은 팔뚝이면

임 한번 숨 막히게

뒤에서 껴안아보기라도 할 것을

그러나 참으로 민망한

오로지 항아리 같은 몸집 하나

늘 움츠리고 살아서인가

아니면 오랜 세월 그리움을

오로지 속으로만 삭여서인가

이젠 버거울 정도로 비만해진, 때론 제 발에 채어 나뒹구는

아, 펭귄아, 그래도 나는 너를 새라고 부르고 싶구나

그래, 너는 새다

푸른 바닷속을 나는 새다

아무도 모르는 해심

너의 수려한, 그 혼신의 애정 표현

영과 육의, 그 전율과 율동

너와 나만이 아는



어둠 속에 서 있다

가끔은 어둠 속에 서있는 것이 좋습니다
어둠속에서 작은 불빛을 바라보거나
작은 불빛에 비춰지거나
그렇게 당신을 마주하는 것이 나는 좋습니다

나는 내가 좀 어두울지라도
당신은 밝기를 원합니다
늘 밝은 창이고
꽃무늬 등갓을 쓴 따뜻한 등불이고
환히 웃는 아침이기를 원합니다

내가 어두운 것은 내가 침울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색깔이고 안료입니다
내가 가끔 길게 침묵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먹을 갈고 있음이고
먹물이 되고 있음입니다

나의 서정은 불타는 저녁노을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짙어가는 땅거미인 것 같습니다
선지에 퍼지는 먹물인 것 같습니다
짙은 혹은 엷은
동양화 한 점인 것 같습니다
밤이 깊으면 그대의 고운 치마저고리에
난초 한 잎 그려줄 것입니다
첫날밤 피보다 짙은


하얀 겨울이 좋을 것같습니다

간밤 추위에 꽁꽁 얼었다가 한낮엔 하염없이 녹아내리는
남향의 창문 같은, 종종 그런 날들이 반복되어
나는 하얀 겨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장갑을 끼거나 목도리를 두르거나
보글보글 차가 끓거나… 그러면
그대의 따뜻한 미소가 떠올라
나는 하얀 겨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대가 없는 도시여도
그대의 따끈따끈한 체온을 느낄 수 있어
나는 하얀 겨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시 북국으로 먼 여행을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북쪽 변경의 어느 낯선 도시에서
눈을 맞으며 생눈길을 걸으며
아주 멀리, 당신을 그리워하고 싶습니다

평생 수자리하는 군졸이어도 좋습니다
차가운 창검 들고 성문을 지키는 긴긴 겨울밤이어도 좋습니다
당신을 그리워하며, 나는
눈이 오는 하얀 겨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눈 오는 날의 편지

온 하루 나도 눈으로 내리고 싶습니다
당신의 마음의 문전까지 내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덜컥 당신의 문을 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당신을 놀래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노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부르지도 않을 것입니다

온 하루 눈이 내립니다
내 마음의 문전과 마당에도 하얗게 내립니다

이제 우리는
서로의 가슴에 하얀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는
어디로도 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어젯밤 당신의 창가에서 서성이었던 발자국도
애써 지우려 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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